지난 글에서는 고려시대의 사회와 문화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국자감을 중심으로 고려시대의 교육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고려시대의 교육
1. 국자감
1) 창설 = 성종 11년(992)에 창설이 되었습니다. 국자감이 창설되기 전에 기틀이 잡혔는데, 태조 13년(930)에 서경(西京) 학교가 창설되고, 성종 5년(986)에 지방의 주·군·현에서 260명의 학생을 뽑아 개경에서 교육을 했습니다. 성종 8년(989) 4월에 교육성과가 뛰어난 태학(太學)의 조교 송승연(宋承演)을 국자박사(國子博士)에 임명하였습니다. 그 후 성종 11년에 이전의 유교식 학교(대학)들을 새로 개편하여 정식으로 국자감을 창설하였습니다.
2) 문묘의 건립 = 묘학제(廟學制)가 성립되었습니다. 묘학제는 문묘(文廟)와 학당(學堂)이 결합된 유교식 학교의 전형입니다. 성종 2년(983) 5월에 박사 임노성이 송에서 가져온 『문선왕묘도』와 『제기도』, 『72현찬기』를 토대로 문묘를 건립하였습니다. 문묘의 건립과 함께 국자감이 출범되었습니다.
3) 국자감 제도의 정비 = 창설 당시의 국자감은 국자사업과 함께 국자학, 태학, 사문학에 각각 박사와 조교를 배치하였습니다. 이 때는 유학 3학부(국자학, 태학, 사문학)만으로 시작하였습니다. 문종 때의 국자감은 국자감의 책임자로 제거, 좨주 등을 임명하였습니다. 박사와 조교 이외에 학정, 학록, 학유, 직학을 두고, 서학, 산학 박사도 신설하였습니다. 국자학, 태학, 사문학을 유학 3학부라고 하고, 율학, 서학, 산학을 잡학 3학부라고 하였습니다. 유학 3학부와 잡학 3학부를 합쳐 경사6학(京師六學)이라고 하였습니다.
2. 국자감 진흥
1) 예종 = 예종 4년(1108)에 국학7재(國學七齋)를 설치하였습니다.
① 여택재(麗澤齋) - 『주역』
② 대빙재(待聘齋) - 『상서』
③ 경덕재(經德齋) - 『모시』
④ 구인재(求人齋) - 『주례』
⑤ 복응재(服膺齋) - 『예기』
⑥ 양정재(養正齋) - 『춘추』
⑦ 강예재(講藝齋) - 무학(武學) * 인종 11년(1133) 폐지
또한, 예종 14년(1119)년 7월에 국자감 교육 진흥을 재정적으로 뒷받침하는 기구인 양현고(養賢庫)가 설치되었습니다. 참고로, 충렬왕 30년(1304)에 안향(1243~1306)의 건의로 섬학전(贍學錢)이 조성되었고, 충선왕(1298, 1308~1313) 때 양현고에 은 50근을 하사였습니다.
2) 인종 = 학식(學式)이 정리되었습니다. 입학 자격은 국자학은 문, 무관 3품 이상의 자손 등, 태학은 문, 무관 5품 이상의 자손 등, 사문학은 문, 무관 7품 이상의 아들 등, 율·서·산학의 학생 및 지방 주·현의 학생은 8품관 이상의 아들 및 일반 서인, 7품 이상의 아들도 자신이 원하면 허락하였습니다. 학생수와 교관 또한 정리되었습니다. 학생수는 국자학·태학·사문학 각 3백 명, 연령순으로 재학하였으며, 교관은 국자학과 태학, 사문학은 박사와 조교를 두고, 율·서·산학은 조교 없이 박사만 배치하였습니다. 교육과정 또한 정리되었습니다. 경서는 9경<주역, 상서, 주례, 예기, 모시, 춘추좌씨전, 춘추공양전, 춘추곡량전(의례도 포함)>을, 공통 필수 과목으로는 신라와 동일하게 『효경』과 『논어』로 정하였습니다. 수업 연한은 효경과 논어는 아울러 1년, 상서와 춘추공양전, 춘추곡량전은 각 2년 반, 주역과 모시, 주례, 의례는 각 2년, 예기와 춘추좌씨전은 각 3년으로 정하였습니다. 기타 과목으로는 산술과 시무책(時務策), 글씨, 자서(字書)를 학습하였습니다.
3. 고려 후기의 국자감
무신정권(1170~1270) 하에서는 국자감 교육이 침체되었습니다. 원 간섭기의 국자감은 계속해서 명칭이 바뀌었습니다. 국학(國學)(1247) - 성균감(成均監)(1298) - 성균관(成均館)(1308) - 국자감(1356) - 성균관(1362)로 개칭되었는데, 혼란한 시기를 대변합니다.
또한, 이 시기에 주자학이 도입되었습니다. 안향이 원에 갔다가 주희(1130~1200)의 책을 베꺼 돌아와 고려에 주자학을 전파하였습니다. 권보(1262~1346)의 건의로 주희의 「사서집주(四書集注)」를 간행하였습니다. 충렬왕 즉위년인 1345년에는 과거시험에 육경의(六經義)와 사서의(四書疑)를 도입하였습니다. 공민왕 16년(1366)에 성균관에 오경재(五經齋)와 사서재(四書齋)를 설치하였습니다. 이색(1328~1396)과 정몽주(1337~1392) 등이 중심이 되어 학풍의 쇄신이 이루어졌습니다. 공양왕 원년(1389)에 율학·서학·산학을 성균관에서 분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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